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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오너가 부모힘을 빌리지않고 자동차가 아닌 자신의 자동차로서 탈 수 있었던 이유

 


도요타로부터 초대 세리카가 등장한 1970년이라고 하면, 오사카 만박이 개최된 해다. 필자는 부모에게 데리고 하네다에서 JAL 더글러스 DC-8로 공로에서 오사카에 들어가 (전혀 여담이지만 그 때의 기내식으로 나온 샌드위치에 끼어 있던 피클이 소금 같아, 이후 경원하도록 되었다), 이 눈으로 박람회를 봐온 세대다. 1970년이라고 하면, 바로 새 시대의 개막 무드 일색으로, 자동차의 세계도, 1960년대와는 밤새도록 양상이 일변했다… … 그런 인상이 있었다.

 바로 그런 1970년 12월에 등장한 것이 초대 세리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라고 쓸 때는 떫고, 상구 같은 설명에 들어가려고 할 때이지만) 세리카는 일본에서 말하는 스페셜 티커의 원조로, 그 원을 추적하면 1964년에 포드에서 등장한 머스탱에 탈착.

 머스탱과 같은 자동차는 미국에서는 승마 입문용 소형 말의 의미를 가진 "포니카"라고 불리며, 젊은 유저에게도 손이 닿고 다루기 쉬운 적당한 스포츠카로 인기를 얻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도요타가 똑같이 세단 등의 바리에이션이 없는 단독 모델로 만든 것이 셀리카에서 그런 자동차가 즉 원래 스페셜티카였다는 것이다. 덧붙여 세리카에는 같은 컴포넌트로부터 동시에 탄생한, 이른바 형제차의 카리나가 있었지만, 이쪽은 세단과 하드 톱의 정통적인 구성이었던 것은 알고 있는 대로.

 그런데 세리카는 스페셜티카였던 머스탱을 여러가지 모방했다. 1973년에 추가 설정된 리프트백(LB)의 리야쿠오타뷰(와 테일 램프의 디자인)가, 머스탱의 패스트백의 스타일을 연상시키는 요소의 하나.

풀초이스시스템=토요타에서는 데일리 오더시스템으로 불리고 있던이유

 



 한층 더 베개사적으로 항상 설명으로 말해지는 '풀초이스시스템'도 실은 머스탱의 방식을 답습한 것이다. 머스탱은 확실히 시장조사에서 이 방식을 짜내는 것이었지만, 세리카는 그 방식을 답습했다는 것이다.

 이번, 편집부·담당 Y씨의 수중에, 어쩐지 이 풀초이스 시스템이 4개의 접이식으로 열람할 수 있는 페이지가 실린 귀중한 당시의 카탈로그가 있다고 한다. 초대 세리카를 소개할 때 1번 보여주고 싶었던 페이지였기 때문에, 1에도 2도 없이 사진으로 해 올려 놓기로 했다.

 필자의 수중에서 발굴이 끝난 것은 LB가 합류한 후의 카탈로그 이후이지만, 풀초이스 시스템은 속행되고 있어 문면에서도 “2개의 참신한 스타일링”에 가세해 “7타입의 외관, 7+3타입의 엔진, 3+3타입의 미션, 15타입의 외장 등 놀라운 풀초이스가 가능합니다”라고 소개되고 있다.

 포인트는 같은 그레이드에서도 엔진이나 트랜스미션 뿐만이 아니라, 내장도 몇개의 패턴이 준비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같은 "커스텀"에서도 스티어링 휠이 나뭇결인지 검은 색이나 검은 색의 가죽 감기인지, 미터 패널도 나뭇결인지 알루미늄 피니시인지 실버 그레이인지 ...... 같은 상태로 선택할 수 있었다.

 그 외에 외관에서는 사이드 스트라이프의 색을 선택할 수 있거나, 엔진에서는 동일 기종으로 하이옥 사양과 레귤러 사양이 있거나… 이 방식의 실현을 위해 도요타에서는 "일일 주문 시스템"이라고 부르는 하루마다 수주 차량의 정보를 집계하고 조립 순서 계획을 만들어 바디 공장에 지시, 각 공정에 생산 지시를 내는 방식을 채용.

 놀랍게도, 지금까지의 주문 방식에 대해 수주부터 납차까지의 일수를 최대로 절반 정도로 단축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상담 시간을 길게 하는 등의 폐해도 발생한 이후 양판 차종과 소량 판매 사양 모두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개선”되었다.

18R-GU 엔진은 동경의 존재였다.



 초대 세리카 그 자체를 만지기 전에 완전히 문자수를 사용해 버렸지만, 초대 세리카는 「미래로부터 온 차 세리카」의 카피대로, 젊은 유저가 부모의 자동차가 아닌 자신의 자동차로서 탈 수 있어, 그때까지 없었다 스포티카로 주목을 받았다.

 엔진은 평생을 통해 보면 1.4L에서 2L까지 폭넓은 설정으로, 특히 처음부터 2T-G형 1.6L·DOHC 탑재의 1600GT(후에 18R-G, 18R-GR, 최종적으로 18R-GU로 진화한 2L의 DOHC 탑재의 2000GT도)는 시리즈 중에서도 별격의 동경의 존재였다.

 물론 나중에 등장한 리프트 백은, “제3의 문”을 가지는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자동차로서 등장. 수중에 있는 카탈로그로부터 문면을 줍면 “단지 드라이브를 즐길 뿐인 차로부터 탈피해, 풍부한 액션으로 도약할 수 있는 멀티 유스카로서 탄생.퍼스널제를 소중히 해, 대형 액션 시대에 응하는 NOW인 어른의 차 ”라고 적혀 있다.

 1970년대라는 만큼 ‘나우한 자동차’였던 것이다. 또 1975년 쇼와 50년 배출가스 규제차에서는 휠베이스가 70mm 늘어나는 등했다. 무엇을 숨기자 이 시기의 세리카는, 필자도 운전 면허를 취득해 「자, 무엇에 타자」라고 바로 빛나는 미래에 눈을 돌리고 있었을 무렵, 당시의 미국 사양과 공통의 5마일 범퍼( 대형 범퍼)가있는 세리카 LB 2000GT의 스타일은 일반적으로 평가가 나뉘어 있었지만, 필자는 결코 싫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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